음악가 이야기

한스 폰 뷜로우 - 나 할말 많은 남자

버터플라이킴 2015. 8. 14. 21:39

 

베를린 필 초대 상임지휘자이자, 코지마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작곡가 한스 폰 뷜로우의 모습

 

 

나 할말 많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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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우리집에 처음 방문했던 날! 
 
"하얀 린넨 원피스 차림에 아빠 손을 꼬옥 잡은채, 우리집 현관 앞에, 13세 소녀였던
당신은 내 앞에 환하게 서 있었습니다. 
 
수줍은 듯 눈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아빠 등을 은신처로, 엉거주춤한 포즈를 취한 채, 당신의 몸을 숨겨 놓고서는 꼼짝도 하지 않더군요"
..... 
 
"그날 당신에 대한 첫 기억을 잊을 수 없었지요!"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 (1830~1894)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리스트(1811~1886)의 딸 코지마(1837~1930)를 기억하는 첫 단상이었다. 
 
혼외 관계였던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 사이에 태어난 두딸 블란디넨과 코지마, 아들 다니엘을 두고, 
1844년 그들은 결별을 한 상태였다. 
 
이후, 마리 다구백작 부인은 파리로 떠났고, 연주여행이 잦은 리스트 입장에서는
마음 놓고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 
전전긍긍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스승인 리스트의 고민을 우연히 알게 됐던 뷜로우는 자신의 어머니께 블란디네와 코지마를 맡겨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리스트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침 그 날은 리스트가 베를린에 있는 뷜로의 집에 두 딸 블란디넨과 코지마를 뷜로의 어머니에게 소개하면서, 자녀들을 잘 돌봐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한 만남이었다. 
 
7년이란 세월을 걸쳐,
뷜로우 집에 머물렀던 그녀들은
뷜로우 어머니를 통해서
엄격한 가정교육이 이루어졌고,
피아노 및 음악 전반적인 교육은 뷜로우가 일임하여 가르쳤다. 
 
교향시의 대가이자 피아노의 파가니니라고 할 만큼 비루투오소였던 아버지 리스트처럼,
코지마는 타고난 음악적 소산과 스케일면서는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뷜로우는 처음 그녀를 가르치면서부터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그는 더욱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을 존경에 가까운 사랑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지 않을까? 
 
" 제게 코지마 리스트는
다른 모든 여인들을 능가하는 존재입니다. 
 
그건 단지 코지마의 성이 '리스트'이기 때문 만이 아닌, 그녀가 마치 당신의 성격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당신을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맹세컨대, 코지마에 대한 제 사랑이 저와 그녀의 관계를 얼마나 강하게 묶어놓건 간,
상관없이, 그녀가 행복해질 수 만 있다면 결코 주저하지 않고 저 자신을 희생할 것입니다.
또한 만약 코지마가 저와의 결혼이 실수였다고 느끼게 된다면 지체하지 않고 그녀를 놓아주겠습니다." 라고 
20세가 된 코지마와의 결혼을 승낙받은 장인 리스트에게 뷜로우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훗날 그의 말이 씨가 되었던 것인지••• 
 
뷜로우는 코지마와의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두 딸의 어머니였던 코지마는 바그너와 바람이 난? 상태였으니,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도,
붙잡아서도 안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1869년, 그는 결혼생활 12년만에
코지마와 이혼을 해야만 했고,
바그너에게 코지마를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대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베를린 필 하모닉 최초의 상임지휘자로 영예를 떨친다 한들
그의 마음 한 구석은 늘 어두움 끝자락의 삭풍 부는 하얀 벌판이었을게다. 
 
"코지마 뷜로우로 살았던 당신만을 기억하고 싶소. 이제 당신은 코지마 바그너가 되었군 ~" 
 
그날은 바로 1870년 10월  25일, 
코지마가 리하르트 바그너(1913~1883)와 
재혼하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할 말 많은 남자. 한스 폰 뷜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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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뷜로우! 
"사랑이 너무 어려워"라고 외치는 듯, 
아직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은 그를 상상하다. 
2015. 5. 10. 佳媛생각